한니발과 포에니전쟁 백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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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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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카르타고와의 1차 포에니전쟁을 통해 3200 달란트라는 거액의 배상금을 받게 된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나가고
시칠리아를 제1호 속주로 임명한다.
지금까지 점령지에 대해 자치권을 부여하고 동맹시로 편입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속주로 만든 것은 대외 정책의 전환을 의미한다.
거대 국가로 발돋움할 발판..
카르타고에게는 여러 문제가 생겼는데
배상금도 그렇지만 용병들의 반란이 문제였다.
급료 및 보너를 지불할 여력이 없으니, 용병들이 반란했고, 3년 4개월 동안 무력을 통해 진압했다.
하밀카르 중심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는 bc237년 당시 카르타고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카르타고의 용병 문제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면
로마는 평화협정 위반이라고 항의하며 배상금을 요구했다.
1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서 로마는 학습한 것이.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었는데, 샤르데냐 등을 갖는 것이 매우 유리했다.
여러가지 사건은 카르타고인들에게 로마인에 대한 분노를 촉발하게 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치욕을 늘 생각했고
아홉살 난 아들 한니발을 카르타고의 주신인 타니트 신전에 데리고 가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게 하였다.
하밀카르는 계획에 들어갔다.
우선 스페인인 히스파니아 정복에 나서서 거대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곳의 은광은 카르타고가 되살아나는 커다란 재원이 되었다.


히밀카르가 눈을 감고,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어 주변의 상업을 독점하고 재정을 풍부하게 만들어 전쟁 이전의 풍요를 되찾았다.
(기원전 237년, 카르트 하다쉬트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는 로마 공화국에 바칠 배상금을 마련하고 국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출정했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무수한 이베리아 부족들을 제압하고 이베리아 해안가 도시와 마을들을 장악했다. 기원전 228년 하밀카르가 이베리아 부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한 뒤, 사위인 '잘생긴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었다. 그는 마스티아에 항구도시 카르타고 노바를 건설하였으며, 여러 부족들을 지속적으로 복속시킨 끝에 에브로 강 이남 일대의 이베리아 반도 상당수를 장악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는 이베리아 반도 카르타고 지배권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의 카르타헤나인 카르타고 노바를 스페인 종쪽에 건설하여 경제적 번영을 이어나갔다.
bc221년 나이 26세로 총독이 된 한니발은(히스파니아) 아버지의 꿈을 잇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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