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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판테온 관광 전에 공부해보자. 판테온 뜻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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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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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오브레전드와 관련이 없는 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종묘라고나 하려나

 

여러 신들을 모셔놓은 만신전 로마의 판테온 (기원 전 27년에 로마의 신들을 모시기 위하여 세운 신전).

 

위의 사전적 의미 중 1번에 해당하는 건축물. 이탈리아 로마시에 있는 건축물이다. 다신교 국가인 로마 제국에서 특정 신이 아니라 모든 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되었다. 그에 맞추어서 이름 또한 그리스어로 '모든(παν)' + '신(θεος)'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돔 형태의 건축물이고 규모면에서도 미국 국회의사당 중앙돔보다 크다.

현존하는 건물은 서기 12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것. 이전의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세웠는데, 하드리아누스가 118~125년에 재건하면서 아그리파를 존중하는 의미로 옛 판테온의 정면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을 그대로 새겼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때 건물을 수리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 어떤 로마 건축물보다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거대 돔 건축물이기도 하다. 직경 43.3 m에 달하는 거대한 돔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비견될 돔이 없었을 정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함께 이른바 <완벽한 고대 건축>이라는 중세 유럽인들의 이상향이며, 판테온의 돔과 실내 장식, 열주(기둥들)는 르네상스 건축과 그 이후의 유럽 전통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판테온 내부에는 자신들의 신앙관에서 모시는 신 외에 피정복민들의 신까지 모셨으며, 고대 지중해의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지 않았으므로, 피정복민의 정체성을 뭉개지 않으며 그들을 자연스럽게 로마 제국 내로 흡수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원래 로마는 다신교였기 때문에 다른 신을 받아들이기에 그리 무리가 없었던 것. 그러다 7세기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정교가 되면서 판테온은 만신전으로서의 역할에서 608년 교황 보니파시오 4세가 동로마 제국 포카스 황제에게 기증을 받아 성당으로 바꾸어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Chiesa Santa Maria dei Martiri)이 되었다. 판테온이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거의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사회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11] 성당으로 사용되면서 입구 양쪽에 종탑이 세워졌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철거되어 고대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상 나무위키 출처

 

 

판테온 (로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아래는 위키백과 출처임

판테온(라틴어: Pantheon[1])은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옛 로마 신전으로, 7세기 들어 가톨릭 성당으로 활용되면서 지금까지 전한다. 판테온은 그리스어 ‘판테이온(Πάνθειον)’에서 유래한 말로, “모든 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로마의 건축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서기 125년경 재건했었다. 모든 고대 로마 건축물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전 세계를 통틀어 당대 건물 가운데서도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고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판테온은 쭉 사용했었다. 현존하는 건물의 설계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건축가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가 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 건물 자체와 건물의 설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나 그의 건축가들이 했을 가능성이 크다. 7세기 이후부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성당으로 사용했다. 판테온은 현재 로마에서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돔 구조이다. 바닥에서 원형 구멍[2]까지의 높이와 돔 내부 원의 지름은 43.3m로 같다.

 

고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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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판테온의 실내.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의 그림. 파니니의 다른 그림을 보려면 빈의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에 있는 [1] Archived 2011년 9월 28일 - 웨이백 머신 참조.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 이후, 아그리파는 그의 집정관의 세 번째 임기 중에 원래의 판테온을 건립하고 이를 신에게 봉헌하였다(기원전 27년).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서기 80년 로마에 일어난 대화재 때문에 다른 건물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서기 125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때 세운 것이다. 원래 있던 명문(“M·AGRIPPA·L·F·COS·TERTIVM·FECIT”. Marcus Agrippa, Lucii filius, consul tertium fecit를 의미하며,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라는 뜻이다.)을 새로운 건물 정면(파사드)에 덧붙였으며, 하드리아누스가 계획한 로마 전역에 걸친 재건 계획을 따라 완전히 재건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동방으로 널리 여행했으며, 그리스 문화를 극히 칭송한 국제적인 황제였다. 그는 모든 신에게 바칠 신전으로 판테온을 건립했으며, 이는 로마 제국 내 로마 신을 믿지 않거나 다른 이름으로 로마 신을 섬기는 백성을 위한 일종의 혼합주의적인 행위였다. 이 건물 실제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220px-Cupola_pantheon.JPG

 

콘크리트에 쓰인 소란 반자는 거푸집에 부어졌으며, 이는 굳기 전까지 아래에 가구 구조를 만들어 지탱했다. 그리고 원형 구멍을 통해 빛을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그리스계 로마 사람으로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을 지낸 로마사(史)의 작가 카시우스 디오는 판테온을 재건하고서 약 75년 후 책을 저술했는데, 실수로 이 건물을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아그리파의 공으로 돌렸다. 디오 책은 판테온에 관한 가장 당대 근접한 저술로 보이며, 이 건물의 기원과 목적이 서기 200년까지도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아그리파는 판테온이라 불리는 건물을 완공했다. 이 건물이 마르스와 베누스를 포함한 많은 신의 조상들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하늘을 닮은 건물의 둥근 천장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본다. (카시우스 디오, 로마사(史), 53.27.2)

판테온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카라칼라 황제에 의해 서기 202년에 보수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pantheum vetustate corruptum cum omni cultu restituerunt(세월에 의해 낡은 판테온을 그들이 모든 정성을 들여 보수하였음)”라는 글이 새겨졌다.

 

 

중세[편집]

220px-Ac.pantheon3.jpg

 

판테온의 열주 현관 아래 부분. 이 열주 현관의 코린트식 오더르네상스와 그 이후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609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포카스는 판테온을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넘겨주었다. 보나파시오 4세는 이 건물을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Santa Maria ad Martyres)라는 이름의 성당으로 개축한 다음 축성(祝聖)하였다(현재는 산타 마리아 데이 마르티리[Santa Maria dei Martiri][깨진 링크([2] 과거 내용 찾기])]로 개명).

판테온은 기독교 성당으로 개축된 덕분에 상당수의 고대 로마의 건물들이 중세 초기에 겪은 파괴와 약탈 등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663년 7월 로마를 방문한 콘스탄스 2세에 의해 자행된 건물들의 약탈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그는 로마에 12일간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금속으로 된 모든 장식들을 끌어내 버렸다. 심지어 한때 모든 신들을 찬미하고자 세워져 판테온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지금은 옛 통치자들의 합의에 따라 순교자들의 무덤이 된 (축복받은 마리아) 성당의 지붕까지도 벗겨 냈다. 그리고 그는 건물에서 청동 타일을 벗겨내어 다른 장식품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220px-Umberto_tomb_pantheon.jpg

 

움베르토 1세의 무덤

수 세기 동안 건물의 외부를 장식하던 양질의 대리석들이 없어져 버렸으며, 심지어 이 건물의 벽에 붙어 있던 기둥의 머리부분은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판테온의 두 기둥은 건물의 동쪽에 접한 중세 건물들 때문에 잘려나가 없어져 버렸다. 17세기 초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현관의 청동 천장을 벗겨 내고 중세풍의 종탑을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한 (19세기 후반에 없어진) 쌍둥이 탑으로 교체했다.[3] 그 외에 없어진 것은 외부의 조각상들로 아그리파의 명문(銘文) 위의 페디먼트를 장식하던 것이었다. 대리석으로 된 실내 장식과 거대한 청동 문은 엄청난 복원 작업을 통해 끝까지 살아남았다.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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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판테온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묻힌 사람들 가운데는 화가라파엘로안니발 카라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 등이 있다. 15세기에 판테온은 그림들로 장식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멜로초 다 포를리성모영보이다. 브루넬레스키와 같은 건축가들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할 때 판테온을 참고했으며, 판테온은 그들 작품에 대한 영감으로 취급받았다.

220px-Dehio_1_Pantheon_Floor_plan.jpg

 

게오르크 데히오/구스타프 폰 베촐트가 그린 판테온의 평면도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는 판테온 현관의 청동으로 된 천장을 녹일 것을 명령했다. 청동 대부분은 산탄젤로 성의 방어를 위한 사석포(射石砲)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며, 남은 청동은 교황 국무처가 다른 여러 작품을 위해 사용했다. 한편, 청동은 베르니니성 베드로 대성당제대 위에 있는 발다키노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교황청에서는 청동의 대략 90%를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발다키노의 청동은 베네치아에서 공수해온 것이라 한다. [3]. 한편, 이에 대해 로마에서는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unt Barberini”(야만인barbarian들도 하지 않았던 것을 바르베리니 가문[우르바노 8세의 가문]이 했다.)와 같은 매우 풍자적인 격언이 등장했다.

1747년 돔 아래의 가짜 창문이 있는 광대한 프리즈가 “복원”되었으나, 원래의 것과는 조금밖에 닮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에 원본의 한 조각이 르네상스 드로잉과 그림들로부터 재구성되어, 패널 일부로 다시 만들어졌다.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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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이탈리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움베르토 1세 두 왕이 묻혀 있으며, 움베르토의 배우자인 마르게리타 왕비 역시 이곳에 묻혀 있다. 비록 이탈리아는 1946년 이후 공화국이 되었지만, 이탈리아 군주주의 단체의 지원자들은 판테온에 있는 왕족 묘지 주변을 감시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화주의자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탈리아 문화유산부 [4]에서 이 건물의 치안과 유지를 담당하고 있었음에도, 교황청 당국에서는 이러한 감시 행위를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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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의 남동쪽 부분

판테온은 아직도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사가 집전되고 있는데, 특히 중요한 축일이나 결혼식 등에 행해진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첫권에 다음 내용이 있다.

종묘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세계의 모든 민족은 고유 신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신전들은 성스럽습니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동양에서는 불교의 사찰,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교회당이 신전의 지위를 대신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전에도 신전은 존재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래의 5개의 신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왕묘입니다.

 

이집트의 하트셰수트(Hatshepsut)여왕의 장제전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중국의 천단(톈탄)

일본의 이세신궁(이세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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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는 3대커피에 둘러싸여있다.

그러다보니 인파가 장난 아니

 

 

판테온신전(pantheon)
오픈시간은9:00~19:30
일요일은18:00까지라고한다.
'판은'모든'이라는뜻이고,
'테온'은'신전'이라는뜻
즉,판테온=로마의모든신에게바치는신전
이런뜻이고,BC25년에건립되었다고한다.

 

로마의판테온신전은최초의직사각형건축물로,
BC25년에건립되긴하였으나화재가일어나
118년부터125년까지재건되었다.
하지만”재건이된것만으로도이미약기000년전이라는점..
정말.기000년전에이런건축물이탄생했다는것자제에서
경이롭다는느낌이가시질맡는다.

 

판테온신전내부에는라파엘로의영묘와
통일이탈리아의초대국왕비토리오엠마누엘레2세의영묘가있다

 

판테온신전은로마시대의건축물중에서
현재까지원형이가장잘보존된명작이라고한다.
이렇게나내부가넓고,높이가자그마치43m나되는데
내부에기둥이하나도없다는것이큰특징이다.
그래서전사의설계라느니,외계인이건축했다는 설까지 등장한다

 

이탈리아로마여행판테온신전의전장은
지름과높이가완벽하게동일한구'형태이고,
이렇게가운데가뚫려있기때문에
비라도오면판테온신전내부에서도비가온다.

 

당시의기술로는전장을닫을수없었다고하는데,
하지만그점을이용해서오히려..
빚이내부에사방으로,아주골고루잘퍼지도록,
그래서불이없어도낮에는어느곳이든훤하도록설계되었다고한다.
고로이걸설계한분은..정말로전재!
돔의외부에는금이씌워져있었는데,
훗날베드로성당청동기등을만드는데사용되었다고한다.
곧바티칸이라는나라자제는어떻게보면
로마의콜로세오와판테온으로만들어졌다는..

 

 

 

 

아래는 wkipedia의 deepL번

 

판테온 (영국: /ˈpænθiən/, 미국: /-ɒn/;[1] 라틴어: 판테움,[엔비 1] 그리스어에서 Πάνθειον 판테온, "[사원] 모든 신들의")는 이전 로마 사원이며 서기 609 년부터 가톨릭 교회 (바실리카 디 산타 마리아 애드 마르티레스 또는 성모 마리아 및 순교자 성당) 이탈리아 로마,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의뢰 한 초기 사원 부지에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BC 27 - AD 14 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아마도 서기 126년경에 헌납되었을 것입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새 신전에 비문을 새기지 않고 불타버린 아그리파의 옛 신전 비문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기 때문에 건축 연대는 불확실합니다.[2]

건물은 원통형이며 페디먼트 아래에 큰 화강암 코린트 식 기둥 (첫 번째 계급에 8 개, 뒤에 4 개씩 두 그룹)이있는 현관이 있습니다. 직사각형 현관은 현관과 로툰다를 연결하며, 로툰다는 콘크리트 돔 아래에 있으며 하늘을 향한 중앙 개구부(오큘러스)가 있습니다. 판테온의 돔은 건축된 지 거의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철근 콘크리트 돔으로 남아 있습니다.[3] 오큘러스까지의 높이와 내부 원의 지름은 43미터(142피트)로 동일합니다.

그것은 모든 고대 로마 건물 중 가장 잘 보존 된 건물 중 하나이며, 대부분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7 세기부터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 (라틴어 : 산타 마리아 애드 마티어)에 헌정 된 교회 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산타 마리아 로톤다"로 알려져 있습니다.[5] 판테온 앞 광장은 로톤다 광장이라고 불립니다. 판테온은 국유 재산으로 이탈리아 문화 유산 및 활동 및 관광부가 폴로 박물관 델 라치오를 통해 관리합니다. 2013년에는 6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

판테온의 커다란 원형 돔형 셀라는 전통적인 신전 현관 전면을 가진 로마 건축 양식에서 독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양식이 부활했을 때 표준적인 모범이 되었으며 후대의 건축가들이 여러 번 모방했습니다.[6]

 

어원

판테온 신전 내부
"판테온"이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판테온"(Πάνθειον)에서 유래되었으며, "모든 신들의, 관련, 공통"을 의미합니다: (pan- / "παν-"는 "모두"를 의미 + theion / "θεῖον"= "신에게 또는 성스러운"을 의미). [7] 그리스어로 글을 쓴 로마 상원의원 카시우스 디오는 이 건물 주변에 배치된 많은 신들의 조각상이나 돔이 하늘을 닮은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추측했습니다.[8] 그의 불확실성은 "판테온"(또는 판테움)이 건물의 공식 이름이 아닌 별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9] 사실 모든 신에게 바치는 판테온의 개념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그리파보다 더 일찍 기록 된 유일한 판테온은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었지만 6 세기 자료에 의해서만 언급되었습니다.[10] 지글러는 판테온의 증거를 수집하려고했지만 그의 목록은 "모든 신에게"또는 "열두 신에게"라는 단순한 헌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신을 숭배하는 컬트가있는 사원이라는 의미에서 반드시 진정한 판테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11]

갓프리와 헴솔은 고대 저자들이 다른 신전들처럼 아에데스라는 단어로 하드리아누스의 판테온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아치형에 새겨진 세베리아 비문은 "아에데스 판테아이"(모든 신들의 신전)가 아닌 단순히 "판테움"을 사용했다고 지적합니다.[12] 디오는 판테온이 모든 신들에게 헌정되었다는 이름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13] 리비는 신전 건물 (또는 아마도 신전 셀레)은 단일 신에게만 헌정되어야한다고 선언되었으므로 예를 들어 건물이 번개에 맞았을 때 누가 불쾌감을 느끼는지 명확하고 특정 신에게만 희생을 바치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27. 25.7-10).[14] 갓프리와 헴솔은 판테온이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특정 신 그룹이나 실제로 모든 신을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 확실히 판테우스 또는 판테오스라는 단어는 개별 신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 그리스어 θεῖος(테오스)는 '신'을 의미할 필요는 없지만 '초인적' 또는 '탁월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12]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의 생트 제네비에브 교회가 해체되어 파리의 판테온이라는 세속적 기념물로 바뀌었을 때 판테온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는 때때로 저명한 죽은자를 기리거나 매장하는 다른 건물에 적용되었습니다.
 

역사

게오르그 데히오/구스타프 폰 베졸드의 판테온 평면도: Abendlandes의 교회 건축. 슈투트가르트 : 1887-1901 년 코타 쉔 출판사.
고대
악티움 전투 (기원전 31 년) 이후 마르쿠스 아그리파는 인상적인 건축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판테온은 기원전 29-19 년에 마르티우스 캠퍼스에있는 자신의 소유지에 그가 만든 단지의 일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정렬 된 세 개의 건물 인 아그리파 목욕탕, 넵튠 대성당 및 판테온이 포함되었습니다. [15] 판테온과 해왕성 대성당은 아에 데스 퍼블레(공공 신전)가 아니라 아그리파의 사적인 신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16] 전자는 건물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어떻게 원래 이름과 목적을 그렇게 쉽게 잃을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지올코프스키는 원래 캄포의 화성 신전이었다고 주장합니다)[17][18].

현재의 건물은 아그리파가 지은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으며 나중에 변경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사원 정면에있는 라틴어 비문 때문이었습니다[19]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판테온 돔. 둥근 돔에는 자연광의 주요 원천 인 중앙 오큘 러스가 있습니다.
M-아그리파-엘-에프-코스-테르 티브-페 시트
또는 전체적으로는 "M[arcus] Agrippa L[ucii] f[ilius] co[n]s[ul] tertium fecit,"즉 "루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로 집정관이되었을 때 [이 건물을] 만들었다."[20] 그러나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아그리파 판테온은 외관을 제외하고 완전히 파괴 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리즈 헤틀랜드는 현재 공사가 두 번째로 화재로 소실된 지 4년 후인 트라야누스 치하에서 114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Oros. 7.12). 그녀는 일반적으로 유지되는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연대에 대한 책임이 있는 허버트 블로흐의 1959년 논문을 재검토하고, 그가 벽돌 도장 연구에서 트라야누스 시대의 벽돌을 모두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의 주장은 문체 증거를 바탕으로 트라야누스 시대의 건축가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루스가 확실한 건축가라는 하일마이어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특히 흥미롭습니다.[21]


로마의 판테온보기, 포함 콘크리트 돔
의 형태 아그리파의 판테온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19 세기 후반 발굴 결과 고고학자 로돌포 란치아니 아그리파의 판테온은 북쪽을 향한 현재의 레이아웃과 달리 남쪽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았으며 "T"의 바닥에 입구가있는 단축 된 T 자형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설명은 20세기 후반까지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아그리파의 건물은 삼각형 현관이있는 원형 형태 였을 수 있으며 나중에 재건 된 건물과 마찬가지로 북쪽을 향했을 수도 있다고 제안했지만, 지올 코프 스키는 그들의 결론이 전적으로 추측에 근거한 것이라고 불평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새로운 데이트 가능한 자료를 찾지 못했지만 그들이 찾은 모든 것을 아그리파 단계로 돌렸고, 그의 유명한 도미티안으로 알려진 사실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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